상단배너
상단 배너 닫기
닫기
다양한 교육상품 할인정보를 놓치지 마세요!
교육상품 >
서태후 세트 : 현대 중국의 기초를 만든 통치자 [전2권]
5%적립
서태후 세트 : 현대 중국의 기초를 만든 통치자 [전2권]
10%
29,600
추가 할인 무이자최대 12개월
618명 관심
서태후 세트 : 현대 중국의 기초를 만든 통치자 [전2권] / 26,640원 (잔여 : 100개)
26,640
총 상품금액 0
0명
필수!확인사항
상품정보
추천연령 : 전 연령
구매수량 : 제한없음
상품/배송문의 태양 고객센터 ☎ 1588-1073
평일 10시~16시, 점심시간 12시 ~ 13시
궁금하신 점이 있으실 경우, 상품문의에 글을 남겨주시면 최대한 빠르게 답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배송환불
배송 : 구매순 순차배송
배송비 : 2,500원 / 10,000원 이상 구매 시 무료배송
- 도서 산간의 경우 추가 배송료 발생
환불 : 단순변심 환불은 상품 수령 후 7 일 이내 가능
- 개봉/사용/훼손의 경우 환불 및 교환불가
- 왕복배송비(반품비)발생

16살에 함풍제의 무수한 후궁 중 한 명으로 선택된 서태후는 함풍제가 사망하고 황제 사이에 낳은 아들이 황위에 오른 뒤로 중국의 실질적인 통치자가 되었다. 서태후가 사망한 지 100여 년이 지난 지금, 그는 폭정을 거듭한 사악한 인물이거나 절망적으로 무능력한 인물로 평가되어 왔다. 살아서는 악녀로, 죽어서는 망국의 장본인으로 남은 인물, 그것이 바로 우리가 아는 서태후의 모습이다.



베스트셀러 《대륙의 딸》과 《마오》에 이어 장융이 세 번째로 선보이는 『서태후』는 영어와 중국어 자료들을 폭넓게 활용하여 정치와 음모, 반란과 침략, 열정과 금지된 사랑 등 서태후에 대한 모든 것을 펼쳐낸다. 서태후가 사망하기 전까지 중국을 다스리면서 중국 개혁을 가로막는 엄청난 장애물들과 어떻게 싸웠는지 생생하게 묘사함으로써 서태후를 향한 기존의 통설을 완전히 뒤집는다.



가령, 서태후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수많은 정적을 제거했다는 이야기에 대해서 저자는 그 수가 많지 않으며 대부분이 서태후를 암살하려 했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한다. 또 그동안 평가절하 되어 왔던 서태후의 업적ㅡ1천 년 넘게 중국 여성을 고문하던 전족 폐지, 비인권적인 노예제와 노예무역 근절, 형벌제 등 억압적 관습 철폐 등을 기록함으로써, 야사와 정치적 암투에 가려졌던 서태후의 삶을 복원한다.

저자 : 장융

저자 장융(張戎, Jung Chang)은 1952년 중국 쓰촨 성에서 태어났다. 열네 살에 홍위병이 되어 문화혁명기 동안 농촌에서 살았다. 공장에서 주물공과 전기공 일을 하다가 대학에 들어갔고, 졸업 후 쓰촨대학교 영어과 강사로 재직했다. 공산당 집권 이후 쓰촨 성의 첫 외국 유학생이 되어 1978년 영국으로 건너가 1982년에 요크대학교에서 언어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영국에 귀화하여 현재 런던에서 살고 있다. 저서로 《대륙의 딸Wild Swans: Three Daughters of China》(1992), 남편 존 핼리데이와 함께 쓴 《마오―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Mao: The Unknown Story》(2005)이 있다. 두 권 모두 국내에서 번역, 출간되었고 4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어 전 세계에서 1500만 부 이상 팔렸다.

1권

이 책의 출전에 관하여

도판 목록



제1부 폭풍우 시대의 황실 궁녀(1835∼1861)

1. 황제의 후궁(1835∼1856)

2. 아편전쟁과 원명원의 전소(1839∼1860)

3. 함풍제의 사망(1860∼1861)

4. 중국에 변화를 가져온 신유정변(1861)



제2부 아들의 옥좌 뒤에서 통치하다(1861∼1875)

5. 근대화 대장정의 첫걸음(1861∼1869)

6. 서방에 최초의 시찰단을 파견하다(1861∼1871)

7. 비운으로 끝난 사랑(1869)

8. 서구에 대한 복수(1869∼1871)

9. 동치제의 생애와 죽음(1861∼1875)



제3부 입양한 아들을 내세워 통치하다(1875∼1889)

10. 세 살 난 아이가 황제로 선포되다(1875)

11. 근대화에 박차를 가하다(1875∼1889)

12. 제국의 수호자(1875∼1889)



제4부 아들 광서제의 친정(1889∼1898)

13. 서태후에게서 멀어지는 광서제(1875∼1894)

14. 이화원(1886∼1894)

15. 은퇴 후의 한일한 시기(1889∼1894)

16. 일본과의 전쟁(1894)



2권

17. 중국을 망친 평화(1895)

18. 중국 쟁탈전(1895∼1898)



제5부 무대 전면으로(1898∼1901)

19. 1898년의 개혁(1898)

20. 서태후 살해 음모(1898. 9.)

21. 광서제를 폐위시키려는 필사적인 노력(1898∼1900)

22. 세계 열강과의 전쟁-의화단과 함께(1899∼1900)

23.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기(1900)

24. 도피(1900∼1901)

25. 회한(1900∼1901)



제6부 현대 중국의 진정한 혁명(1901∼1908)

26. 북경으로의 귀환(1901∼1902)

27. 서양인들과의 친교(1902∼1907)

28. 서태후의 개혁(1902∼1908)

29. 투표!(1905∼1908)

30. 반란, 암살, 일본에 대항하다(1902∼1908)

31. 최후의 나날(1908)



맺는말: 서태후 이후의 중국



참고한 문서 보관소

감사의 말

옮긴이의 말

도판 출처

참고문헌

찾아보기

아름다운 후궁에서 만인의 군주가 된 여인, 서태후
1852년 봄에 있었던 청 황실의 정기적인 전국 규모 궁녀 간택에서 16세의 소녀가 황제의 눈에 들어 궁녀로 뽑혔다. 중국 황제는 한 명의 황후와 그가 원하는 만큼의 후궁을 둘 수 있었다. 황실 등기부에 그녀는 단지 ‘나랍씨 가문의 여자’라고만 올라 있고 이름은 기재되어 있지 않았다. 여자의 이름은 너무 하찮아서 기재할 필요조차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10년도 안 되는 세월 동안에, 그 이름이 영원히 묻혀버릴 뻔했던 이 소녀는 악전고투하며 권력의 사닥다리를 타고 올라가 중국의 최고 통치자가 되었고, 그 후 1908년 사망할 때까지 수십 년 동안 전 세계 인구의 3분의 1에 달하는 사람들의 운명을 양손에 쥐고 흔들었다. 그녀는 바로 자희 황태후이다. (1권 19쪽)



아들을 대신해 나라를 다스리다
대신들은 접견이 시작되기 전에 소박한 천으로 덮인 평범한 탁자와 의자 들을 갖춘 집무실에 앉아 몇 시간씩 기다렸다. 군기대신들과 회의가 끝나면 두 태후는 전국 각지에서 온 관리들을 접견했다. 어린 동치제가 장막 앞의 옥좌에 앉아서 신하들을 마주하노라면, 그의 뒤로 두 황태후가 희미하게 보였다. (…) 주로 질문을 던지는 사람은 서태후였다. 그녀는 아주 권위가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관찰한 바에 따르면 후궁 지역에 있을 때 그녀는 생기가 넘치고 웃는 것을 좋아했다. 그러나 환관이 다가와 무릎을 꿇고서 건청궁으로 갈 가마가 대령되었다고 알리면 그녀는 웃음을 싹 거두고 근엄한 표정을 지었다. 장막이 중간에 가로막고 있었지만 신하들은 당당한 그녀를 느낄 수 있었다. 또 그녀도 신하들의 인품을 잘 파악했다. 서태후를 만나본 많은 사람들이 그녀가 ‘우리의 생각을 읽는 것 같았다’고 말했고 또 ‘그녀는 딱 보면 상대방의 성격을 간파하는 것 같았다’는 말도 했다. (1권 96~97쪽)



세관을 개혁하다
하트의 지휘 아래 중국 세관은 노후하고 부패한 조직에서 잘 정비된 근대적 기관으로 탈바꿈하여 중국 경제에 크게 기여했다. 1865년 중반부에 이르기까지 5년 동안, 세관은 중앙정부에 3200만 테일이 넘는 돈을 올려 보냈다. 영국과 프랑스에 대한 배상금은 이 관세 수입으로 지불되었고 1866년 중반부에 완불되었는데, 배상금이 국가 전반에 미친 고통은 미미했다.

새로운 부(富)가 확보되자 서태후는 대규모로 식량을 수입하기 시작했다. 중국은 오래전부터 자급자족할 수 있는 식량을 생산하지 못했기에 곡식 수출을 금지했다. 1867년부터 세관 기록부는 무관세 수입품들을 체계적으로 기록했다. 1867년에 주식인 쌀 수입은 110만 테일어치였다. 식량 조달과 구매는 하트 휘하의 세관이 맡은 주된 업무였다. 서태후는 이 업무를 총 지휘하는 하트에 대하여 각별한 신임을 보냈다. (1권 108쪽)



새로운 교육기관을 도입하다
중국 최초의 근대식 교육기관은 동문관(뒷날 북경 대학이 되는 학교)이었다. 이 대학은 서태후가 집권한 직후인 1862년에 설립했는데 통역사를 육성했다. 설립 당시에는 별 반발이 없었다. 중국으로서는 외국인들을 상대할 대 통역사가 필요했던 것이다. 이 학교는 그림 같은 건물을 자랑했다. 대추나무들, 우거진 라일락과 영춘화 사이로 학과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러다가 1865년에 서태후가 공친왕의 건의를 받아들여 과학까지 가르치는 정규대학 과정으로 승격시키려 하자 주위에서 격심하게 반대했다. 지난 2천 년 동안 유교 경전만이 교육상 적절한 학과 과목으로 여겨져왔던 것이다. 서태후는 ‘중국의 사상을 선양하기 위해 서방의 방법을 빌려오는 것(中體西用)’이며 ‘옛 성현들의 신성한 가르침을 대체하려는 것은 아니다(東道西器)’라고 하면서 그 결정을 옹호했다. 하지만 이런 설명은 유교 경전을 외운 덕분에 현재의 지위에 오른 관리들을 납득시키지 못했고, 그들은 총리아문과 공친왕을 ‘서양 놈들의 앞잡이’라며 비난하고 나섰다. 도시의 성벽에는 공친왕을 비난하는 낙서가 자주 등장했다. (1권 119쪽)


서명
  • 상품에 대해 궁금한 점은 상품문의를 이용해주세요
  • 교환/환불 및 배송관련 문의는 고객센터 내 1:1 문의하기를 이용해주세요.
  • 상품문의를 통한  취소나 환불, 반품 등은  처리되지  않습니다.
  • 상품과 관계없는 글, 양도, 광고성, 욕설, 비방, 도배 등의 글은 예고없이 삭제됩니다.
상품 문의하기
옵션 선택
오늘특가
  • Loading...

에듀팡 로그인

반갑습니다.

회원님의 계정 상태가 휴면계정에서 정상계정으로 복구되었습니다.

에듀팡 이용에 앞서
회원정보수정 페이지에서 개인정보의 변동내역을 확인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