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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들의 포도주 [마음산책]
죽은 자들의 포도주 [마음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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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맹 가리가 스물세 살에 쓴 첫 장편소설
사후 12년이 지나서야 드러난 원고

로맹 가리는 그에게 두 번째 공쿠르상을 안겨준 에밀 아자르라는 필명 외에도 프랑수아 봉디, 샤탄 보가트, 프랑수아즈 로바, 포스코 시니발디 등 여러 필명을 사용해 평생 30편이 넘는 장편소설을 쓰고 숨은 이야기를 남겼지만, 그중에서도 이 소설 『죽은 자들의 포도주』에 얽힌 일화는 기구하다. 본명인 ‘로만 카체프’에 가까운 ‘로맹 카체프’로 남긴 유일한 장편소설이면서 그의 생애 첫 장편소설이고, 또 그가 생전에 출간을 보지 못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로맹 가리가 엑상프로방스대학 법학과에 입학하던 열아홉 살에 쓰기 시작해 스물세 살인 1937년 탈고했으나 여러 번 출간을 거절당한 탓에 그의 포부로만 남아 있었다. 그러다 1938년, 로맹 가리는 당시 그가 연모하던 스웨덴 기자로 기혼자이던 크리스텔 쇠데룬드에게 이 원고를 사랑의 증표로 주었는데, 로맹 가리의 손을 떠난 원고는 그가 세상을 뜬 지 12년이 지난 1992년에야 파리 드루오 호텔에서 경매품으로 세상에 처음 공개되었다. 그때까지 원고를 보관한 건 크리스텔 쇠데룬드였다.

그로부터 다시 22년이 지난 2014년에야 이 원고는 갈리마르 출판사를 통해 책의 꼴로 빛을 보았다. 초고답게 장 구분도 없이 한 호흡으로 적혀 있던 원고는 편집을 거쳐 그럴듯한 짜임새를 띠게 됐는데, 원서를 편집한 사람은 1992년 경매에서 초고를 낙찰받은 당사자, 문학 편집자이자 인류학자 필리프 브르노다. 마음산책의 열두 번째 로맹 가리 작품이자 소설로는 열 번째인 『죽은 자들의 포도주』는 2014년 출간된 초판본을 우리말로 옮겼다.

저자: 로맹 가리

참고 사항

사기 치지 마!
거인 경찰
창피스러워라!
마인 고트!
소녀
가스 협박
다들 꼼짝 마!
무명 병사
조제프 씨
성배
경찰들의 밤
피에로와 콜롱빈
제막식
앙주 부인
덥수룩한 다갈색 머리 여자
그리스도와 어린아이와 성냥
아나스타즈 삼촌
만돌린
도냐 이녜스
지진
두 머리
인간의 영혼

해설
옮긴이의 말

로맹과 (『새벽의 약속』에서 브리지트가 될) 크리스텔의 격정적 연애는 1937년 7월부터 1938년 4월, 크리스텔이 신문사의 요청으로 나치 독일의 오스트리아 병합 취재를 위해 파리를 떠나 빈으로 떠나기까지 열 달 동안 지속된다. 이후 두 사람은 서신 왕래로 관계를 지속했고, 이 관계는 1939년 6월 로맹이 남편에게 되돌아가 살고 있는 크리스텔을 만나기 위해 스톡홀름에 갔다가 허탕을 치면서 끝이 난다. 로맹은 크게 상심했고, 크리스텔을 결코 진정으로 떠나보내지 못한다. 그는 수년이 지난 뒤에도 여전히 애정이 듬뿍 담긴 숱한 편지를 그녀에게 보낸다. 아마 로맹은 1938년 초반 크리스텔이 빈으로 떠날 때, 자신이 표현할 수 있는 절대적 사랑의 증거로서 『죽은 자들의 포도주』의 원고를 주었을 것이다.
-241쪽, 「해설」

잠자코 죽지 못하는 시체들의 소동
로맹 가리의 가장 발랄한 소설

『죽은 자들의 포도주』는 작가가 ‘로맹 가리’라는 필명을 갖기 이전인 20대 초반에 쓴 작품이다. 세월의 고뇌와 사회적 무게를 짊어지기 전의 작품답게 경쾌한 펜 놀림으로 써내려간 이 소설은 공동묘지의 죽은 자들, 해골들을 등장시켜 다양한 인간상과 세상을 풍자하고 시종일관 농을 던진다. 어느 밤 주인공 튤립은 술에 거나하게 취해 철책을 넘고 공동묘지로 들어간다. 사람의 기척이라곤 없는 곳, 휘우뚱거리며 겨우 몸을 가눌 정도로 인사불성인 그의 귀에 돌연 꺽센 노인들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시체 같은 몰골로 관 뚜껑 위에 앉아 티격태격하는 그들의 모습에 놀란 튤립은 공동묘지를 벗어나려고 노력하지만 그곳의 미로에서 허우적대며 온갖 해골들의 노닥거림과 불평, 생전의 구구절절한 사연을 하나하나 맞닥뜨리게 된다. 폭압적인 경찰과 자유 분자, 적이지만 우정을 나눈 독일 병사와 프랑스 병사, 애만 싸지른다고 닦달하는 장모와 가스로 자살하겠다고 협박하는 무능한 사위, 신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는 사제들과 인간의 악행 때문에 술독에 빠진 신, 살아생전 듣던 아내의 잔소리를 저승에서도 들어야 하는 사내, 끊임없이 험담을 즐기는 세 수녀…….

“‘그 집 안주인 어머니라고요? 그럼 집세를 대신 내주러 오신 거군요. 그렇죠, 친애하는 부인? 집세가 밀린 지 1년 됐어요!’ (…) ‘대체 뭘 바라기에 그렇게 사람을 흘금거려요? 왜, 내가 대신 나가라고 말해줘요?’ 집주인이 대답했어요. ‘뭘 바라느냐고요? 아무것도. 난 그저 부인이 그 집 안주인 엄마라기에! 아무튼 그 집에 간다니, 애들 부모한테 만일 한 번만 더 그 집구석의 꼬질꼬질한 꼬마 중 하나가 계단에 오줌이나 똥을 싸놓으면 내가 목을 비틀어버린다고 전해주쇼!’ 경비가 코를 치켜든 채 나를 흘겨보며 거들더군요. ‘들었죠? 꼭이에요!’ 내가 말했어요. ‘왜 자꾸 사람을 흘금거려요? 푼수들! 원, 내가 계단에 똥오줌을 싸기라도 했나?’ 경비가 응수했죠. ‘푼수는 그쪽이고요! 그쪽이 똥오줌을 싼 게 아닌 건 확실해요! 그쪽은 똥오줌을 싸기보다는 먹을 것같이 생겼으니까!’”
-53~54쪽

주인공 튤립은 공동묘지에서 벗어나려고 애쓰면서도 어느덧 그들의 이야기에 동화돼 추임새를 넣으며 소란스러운 분위기를 거든다. 산 자와 죽은 자의 경험이 한데 섞인 요란하고 우스꽝스러운 에피소드들은 난센스 코미디이자 세상을 흉보는 부조리극으로서 끊임없이 웃음을 준다. 로맹 가리는 자신의 유년 시절에 큰 영향을 끼쳤을 제1차 세계대전의 어수선한 사정이며 그 안에서 불거지는 인간 본성, 부르주아 사회의 도덕적 위선은 물론 노골적인 화장실 유머까지 20대 초반의 그답게 당차게 쏟아낸다. 너무 진지하고 공포스러운 세상에, 개인들의 어깨를 짓누르는 무거운 세상에 유머라는 분뇨를 끼얹어 숨통을 틔우고 인간다움을 일깨우려는 듯이. 『죽은 자들의 포도주』는 프랑수아 라블레, 니콜라이 고골, 에드거 앨런 포, 루이스 캐럴 등 위대한 작가들에게 영감 받은 청년 로맹 가리의 패러디이자 오마주로, 그의 넘치는 발랄함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메르몽 하숙집의 기억
로맹 가리 문학의 모티프로 꽉 찬 소설

이곳에서의 삶은 로맹에게 마르지 않는 영감의 원천이다. 다양한 하숙생, 그리고 그만큼 다양한 그들의 개성과 성격이 젊은 작가에게 영향을 미쳤다. (…) 하숙집은 건물의 세 개 층을 차지했고, 로맹과 모친 미나의 방은 『자기 앞의 생』에서 로자 부인이 “엘리베이터도 없는 7층”에 살았던 것처럼 각각 7층과 8층에 위치해 있었다. 바로 이곳에서 로맹은 다양한 인간 군상을 발견한다. (…) 손님들이 저마다 특별한 사연을 간직한 채 속속 찾아들었다. (…) 메르몽 하숙집은 로맹 가리에게 미래의 작품들을 위한 진정한 실험실이었다. (…) 그가 첫 단편소설과 첫 콩트와 첫 장편소설을 쓴 것도, 첫사랑을 알게 된 것도, ‘자기 앞의 생’의 고된 수련을 한 것도 바로 이 메르몽 하숙집에서였다.
-247~249쪽, 「해설」

10대 시절의 로맹 가리는 어머니가 관리인으로 일하던 메르몽 하숙집에서 살았다. 어머니와 단둘이 지내던 그에게 메르몽 하숙집은 인간 군상을 관찰하고 숙고하게 해준 창구였는데 그때의 인연들은 훗날 그의 소설들에 어김없이 자양분이 되었다. 『죽은 자들의 포도주』는 소설가 로맹 가리의 바탕이라 할 메르몽 하숙집에서의 경험이 유독 두드러진 소설이다. 아내가 하숙집을 운영하는 주인공 튤립은 시체들의 사연을 듣는 족족 “내 마누라가 예전에 방을 세줬던”이라는 말과 함께 세입자들의 기억을 끄집어낸다. 어느 탐욕스러운 장관의 시중꾼, 예술의 경지로 침을 뱉던 사내, 방을 착각해 실수로 불륜을 저질러버린 남자, 고담준론에 사로잡혀 현실의 미인을 거부하는 남자, 기적을 믿지 않는 사제 등 언뜻 평범하지만 별난 인물들이 소설 곳곳에서 소환돼 이야기를 다채롭게 만든다. 사람 구경만큼 재밌는 건 없다는 사실을 로맹 가리는 일찍이 메르몽 하숙집에서 깨쳤다.

메르몽 하숙집이 로맹 가리 문학의 모태인 만큼, 그곳에서 쓴 『죽은 자들의 포도주』는 훗날 로맹 가리가 쓴 주요 작품들의 모티프로 가득하다. 실제로 『죽은 자들의 포도주』에 쓰인 여러 문장과 에피소드는 『가면의 생』 『자기 앞의 생』 『유럽의 교육』 『그로칼랭』 같은 소설들에 그대로 쓰이거나 아주 조금 바뀌어 있다. 즉, 로맹 가리는 처음부터 자신의 문장을 갖고 있었으며 첫 장편인 이 소설만큼 오랫동안 애정을 쏟은 작품이 없다고 짐작해볼 수 있다. 로맹 가리가 죽고 1년이 지난 1981년, 그가 진짜 ‘에밀 아자르’임을 밝힌 『에밀 아자르의 삶과 죽음』에는 이 소설이 이렇게 언급돼 있다. “나는 이 원고를 온갖 전쟁이며 풍랑이며 대륙들로 끌고 다니며 던져두었다가 다시 붙잡기를 되풀이했다. 이 소설은 청춘부터 성숙한 시기까지 줄곧 나와 함께했다.” 로맹 가리는 이미 오래전 죽은 자들의 대열에 합류했지만 그의 청춘이 봉해진 첫 장편 『죽은 자들의 포도주』는 이제 삶을 시작했다.

“꿱꿱! 간단해! 경찰 하나한테 하층민 옷을 입힌 다음 행렬에 잠입하게 해서 경찰을 향해 돌을 던지게 해…… 이후엔 우리가 곤봉으로 하층민을 공격하면 그만이지. 박살 내고 조각내고 가루를 만들어서 사방 곳곳에 뿌려버리라고! 만일 신이 한 소리 하거들랑 이렇게 대답해. ‘저희가 먼저 공격당했습니다.’ 그럼 신도 암말 안 할 테니. 꿱꿱! 꿱꿱! 꿱꿱!”
-1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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