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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책들] 일본 한국 병합을 말하다 : 일본의 진보 역사학자들이 말하는 한국 강제 병합의 의미 [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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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한국병합을 말하다』는 도쿄 대학교 명예교수 와다 하루키, 성균관대학교의 미야지마 히로시, 와세다 대학교의 이성시 등 16명의 일본 진보 역사학자들이 이야기하는 한국 강제 병합의 의미를 살펴본 책이다. 총 5부로 구성하여, 한국 병합 100년과 일본인에 대한 이야기부터 한국 병합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추적하고, 식민지 지배하의 조선의 모습과 한국병합의 역사적 인식에 대한 각 역사학자들의 의견을 서술하고, 사료를 첨가하였다. 부록으로 ‘근대 한일 관계사 관련 연표’를 실어 각 역사학자들의 논고를 독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구성하였다.

저자 : 미야지마 히로시

1948년 일본 오사카에서 출생하여 교토대학 문학부를 졸업했고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문학연구과 석사 및 박사과정을 수료했다(동양사학 전공). 이후 도카이(東海)대학 문명학부 강사, 도쿄도립대학 인문학부 조교수, 도쿄대학 동양문화연구소 교수를 거쳐 2002년부터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학술원 교수로 재직 중이며, 2010년부터는 도쿄대학 명예교수도 맡고 있다. 그동안 한국의 조선시대와 근대시기의 경제사, 사회사, 사상사 분야에 집중적인 연구를 했고 동시에 한국사의 특징을 동아시아적 시야에서 파악함으로써 한국 학계와 외국 학계의 소통을 위해 고민해왔다. 주요 저서로 '朝鮮土地調査事業史の硏究'(1991년, 도쿄대학 동양문화연구소), '兩班'(1995년, 중공신서, 한국어판: '양반' 노영구 옮김, 1996년, 도서출판 강), '明淸と李朝の時代'(공저, 1998년, 중앙공론사, 한국어판: '조선과 중국 근세 오백년을 가다', 김현영·문순실 옮김, 2003년, 역사비평사), '미야지마 히로시, 나의 한국사 공부(2013, 너머북스)' 등이 있다.

제1부 한국 병합 100년을 묻다

한국병합 기념비 앞에서
-미즈노 나오키
일본사 인식의 패러다임 전환을 위하여
-미야지마 히로시
한국병합 100년과 일본인
-와다 하루키

제2부 한국 병합에 이르기까지

동학 농민군 섬멸 작전과 일본 정부
-이노우에 가츠오
한국 군인의 항일 봉기와 <한국 병합>
-신창우
이토 히로부미의 한국 통치과 조선 사회
-오가와라 히로유키

제3부 식민지 지배하의 조선

무단 정치와 조선 민중
-조경달
내무 관료와 식민지 조선
-마쓰다 도시히코
내무 관료와 식민지 조선
-마쓰다 도시히코
식민지기 정치사를 서술하는 시각에 대해
-오카모토 마키코

제4부 한국 병합의 역사 인식

<한국 병합>과 고대 한일 관계사
-이성시
에도 시대 민중의 조선ㆍ조선인관
-스다 츠토무
근세 일본과 동아시아
-후카야 카츠미
메이지 초기 조일 관계와 정한론
-요시노 마코토

제5부 한국 병합과 일본인

간토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에 대한 책임
-야마다 쇼지
한일 회담 반대 운동과 식민지 지배 책임론
-이타가키류타

부록 근대 한일 관계사 관련 사료 및 연표

Ⅰ 조선의 개국과 <독립>
Ⅱ 대한제국의 흥망: 청일 전쟁에서 <한국 병합>까지
Ⅲ 무단 정치에서 문화 정치로: <한국 병합>에서 만주사변까지
Ⅳ 15년 전쟁하의 조선: 만주사변에서 해방까지
Ⅴ 근대 한일 관계사 관련 연표

출간후기_ 다시 100년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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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비판적 지식인들이 재조명한 <한국 병합>의 의미

2010년은 일본이 한국을 강제 합병한 지 100년이 되는 해였다. 한일 양국에서는 이를 기념해 각 학계에서 관련 학술 대회를 열었고, 한일 역사학자들이 공동으로 성명을 발표하는 등 <한국 병합 100년>의 역사를 재조명하는 유의미한 행사를 기획했다. 이 책은 일본의 진보 학자들이 2010년 일본의 이와나미 서점에서 간행하는 학술 잡지 『사상思想』에 <한국 병합 100년을 묻다>라는 주제로 특집호를 마련하고 같은 해 8월에 이를 토대로 심포지엄을 개최한 결과물을 단행본으로 엮은 것이다. 한국 병합을 주제로 한 『사상』 특집호가 나오자마자 매진 사태가 벌어지고 이 특집호를 보강해 단행본으로까지 출간하는 등 일본에서의 반응은 뜨거웠다. 아울러 8월에 열린 심포지엄에 일반인들도 대거 참석해 이틀간 참가자가 총 1천 명이 넘을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다.
100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지만 <한국 병합>을 둘러 싼 문제는 한일 양국에서 여전히 정치적, 역사적으로 논쟁적인 이슈임이 분명하다. 이 책을 기획한 미야지마 히로시는 이 문제를 놓고 일본 국내에서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실상이며, 이를 해결하지 않으면 다음의 100년 동안에도 논쟁은 계속될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한국 병합이 어떤 의미로 자리매김해야 되는지 오늘날의 시점에서 다시 검토해 보자고 제안한다. 특히 한국 병합을 단순히 일본과 한국의 근대사 문제로만 다룰 것이 아니라 동아시아사 전체를 새로운 시각에서 다루기 위한 문제 설정의 장으로 생각해 보기를 권하고 있다. 이에 따라 일본 내의 한국사 연구자들이 각자의 전공 분야에서 한국 병합을 둘러 싼 제반 문제를 심도 있게 다루고 이를 공론화함으로써 논의의 장을 마련했다.
최근까지도 한국 침략 문제와 위안부 문제, 독도 문제를 둘러싸고 일본의 우익계 인사들이 여전히 망언을 일삼고 돌발 행동을 벌이고 있는 상황에서 일본의 자성을 끊임없이 요구해 온 진보 인사들의 연구 활동을 정리한 이 책은 일본 내에서 이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변화해 왔고 현재 어느 수준에 이르고 있는지 파악해 볼 수 있는 좋은 참고 자료가 된다. 미야지마 히로시의 말처럼 100년의 전철을 다시 밟지 않기 위해 현재 단계에서 한일 양국이 한국 병합 문제를 어떻게 인식하고 해결해야 할 것인지 그 논의의 장을 이 책이 새롭게 제시하고자 했다.

“<동아시아 중심으로서 일본사>라는 패러다임 버려야
<한국 병합>을 보는 시각 바뀐다”


이 책의 대표 저자이자 현재 성균관대학교 교수인 미야지마 히로시는 한국 병합이 낙후된 조선을 근대화시키기는 계기가 되었다는 일본의 침략론은 일본이 <동아시아의 중심>이라는 패러다임에서 벗어나지 못해 빚어진 역사 인식이라고 지적한다. 아울러 일본이 스스로 일본사 인식의 패러다임을 전환하지 않으면 한국 병합을 바라보는 시각 역시 변화될 수 없으며 <동아시아 주변부로서 일본사>라는 시각에서 이제까지의 일본사 이해를 비판하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모색해야 함을 주문한다.(16쪽)
한국 병합 당시 일본은 사실상 동아시아의 주변적 지위에 있었다는 그의 역사 인식은 일본이 유교 모델을 거부했다는 점에 근거하고 있다. 동아시아의 여러 국가가 점차 유교 모델의 수용을 추진했으나, 그 가운데 일본만이 이러한 움직임에 동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17쪽) 일본에서 유교 모델에 대한 무관심이 결정적으로 굳어진 것은 메이지 유신 이후였다. 일본의 근대화는 곧 문명화로 규정하는 데 탁월한 이데올로그였던 후쿠자와 유키치는 문명화에 대한 최대의 장해가 유교에 있다고 간주해 유교를 철저히 배격했다. 그리하여 그는 유교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한 중국과 조선으로부터의 결별, 즉 탈아를 선언하며 일본의 문명화를 설파한 것이다.
그렇다면 유교를 수용하고 있던 중국과 조선이 정체 상태에 머물러 있었을까? 일본의 예상은 이토 히로부미가 한국 통감으로서 추진한 사법 제도 개혁 과정에서부터 빗나가기 시작한다. 근대법인 일본의 민법을 한국에 그대로 적용하면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할 것을 우려해 한국 독자의 민법을 제정하려 했으나 조사 결과 근대적 소유권과 매우 유사한 토지 소유권이 이미 한국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 확인된 것이다. 즉 몹시 지체되어 있어야 할 한국에서 근대적 소유권과 유사한 개념이 수백 년 전부터 존재했다는 것인데, 이는 유교 모델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21쪽)
유교 모델 자체를 봉건제의 잔재로 치부해 탈아를 통한 근대화를 추진하고자 했던 일본의 근대화 패러다임의 근본적 한계는 다른 부분에서도 드러난다. 즉 한국은 일본과 달리 중국에 인접하여 중국 문화에 선택의 자유 없이 동화되었다는 인식이 그것인데, 거기에는 가장 중요한 전제가 간과되어 있다. 다시 말해 조선에서 중국 문화가 전면적으로 수용되었다고 하는 경우 수용하는 측의 사회가 고도의 문화적 기반을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는 것으로, 예를 들어 유교 모델의 핵심인 과거 제도가 현실적으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인쇄 기술의 발달과 그에 따른 서적의 보급이 필수적인 조건인데, 이러한 조건을 충족시키는 것은 15세기 일본에서는 불가능했다는 게 미야지마의 지적이다.(24쪽)
일본 역사학계는 지금도 여전히 14세기에 동아시아에서 시작된 유교 모델의 확립과 보급이라는 역사적 흐름을 간과하거나 부정적으로 파악하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일본의 <한국 병합> 인식 문제는 그러한 부정적 견해와 상당 부분 연관이 있다. 일본이 동아시아의 주요한 역사적 흐름을 부정하고 탈아적 근대상을 주장하는 한 <한국 병합>의 강제성과 모순성을 직시할 수 없을 것이다.

“일본 정부와 군부 지도자가 동학 농민군 전원 살육 명령 내렸다”

이 책에는 일본 학계뿐만 아니라 한국 학계에도 잘 알려지지 않는 심도 깊은 연구 성과물을 담고 있는데, 청일 전쟁 당시 일본 정부가 내린 동학 농민군 섬멸 작전의 전말이 대표적이다. 청일 전쟁 당시 신식 라이플 소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이 대본영의 명령에 따라 동학 농민군을 전원 살육한 작전을 추적한 이노우에 가츠오는 지금도 은폐되어 있는 이 사건을 통해 한국 병합 직전의 일본 정부와 군부의 비인도적 속성을 폭로하고 있다.
청일 전쟁 당시 동학 농민군의 희생자 수는 3만여 명. 부상 후 사망한 경우를 포함하면 5만 명에 육박할 것으로 추정된다.(77쪽) 청군과 일본군의 전쟁에서 조선의 동학 농민군의 피해가 가장 컸던 이유는 무엇일까? 1894년 10월 27일, 히로시마로부터 동학 농민군 <모조리 살육> 명령이 떨어진 것이 크게 작용했다. 조선 정부의 주권하에 있는 조선 민중을 살육하는 행위인 동학 농민군 살육 명령을 대본영이 내리는 것에 조금의 정당성이 있는 것일까?(83쪽) 이에 대한 조선 정부의 대응은 어떠했을까? <동학 농민군의 대다수는 협도(협박당한 자)로서 그 흉하고 완고하며 교화되기 어려운 자는 천백 중 겨우 한둘뿐, 초무할 적에 마땅히 양인과 악민을 분별해야 하고, 청하건대 일본군을 훈계하여 매사에 조선 군관과 상의할 것>(84쪽). 김홍집 외부대신의 위와 같은 회답은 일본의 <섬멸> 작전에 제동을 건 것이었다. 그러나 일본군은 조선 정부의 이러한 요청을 무시하고 살육 작전을 감행했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조선에 진출해 있던 일본군이 자체적으로 감행한 작전이 아니라 히로시마 대본영의 총리대신과 참모 총장, 참모 차장, 그리고 도쿄의 외무대신 등 이른바 정부와 군부의 최고 지도자가 조선 현지의 일본군을 선도했다는 것이 당시 타전된 전신 기록을 통해 밝혀졌다. 학살에 버금가는 살육 명령이 필요했던 까닭은 평양 전투 이후 중국 영토 내부로의 침공이라는 모험적인 전략 때문이었다. 이 작전의 전모는 결국 은폐된 반면, 일본의 대륙 침공 작전은 대대적으로 부풀려졌다. 일본 정부와 군부의 지도자가 주도한 이웃 나라 정부와 민중에 대한 주권과 생명의 유린은 불문에 붙이고 만 것이다.(101쪽) 이것이 한국 병합 직전에 보여 준 일본 정부의 속성이었다.

“한국 병합은 조선 전통의 이의 제기의 정치 문화를
부정하고 단절시킨 체제”


일본의 한국 병합이 조선 민중에게 끼친 영향을 분석한 조경달과 오가와라 히로유키는 무엇보다 그것이 조선 고유의 유교적 민본주의를 단절시킨 계기가 되었음에 주목한다. 오가와라에 따르면 조선 왕조에서는 국왕이 행차할 때 백성이 국왕에게 직접 호소하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특히 영정조의 군권 강화책 아래 다수의 민소가 이루어졌다고 보았다. 비록 19세기 안동 김씨 등에 의한 세도 정치하에서 민소는 현실적으로 저해되어 갔지만, 원리적으로는 직소를 행하는 것이 유교적 민본주의의 이념에서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었다는 것이다.(149쪽) 또한 조경달에 따르면 왕조 시대에 조선 민중은 어느 정도 지배 정책이나 수탈에 불만이 있었다고 해도 곧바로 왕조 타도의 방향으로 나아가지는 않았는데 그것은 유교적 민본주의에 따른 지배에 대한 합의 시스템이 구축되어 있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민중은 필사적으로 수탈을 감내하는 가운데 공론을 통해서, 혹은 민란이라는 폭력을 통해서 스스로의 의지를 상달할 수 있었다는 것인데 그러한 경우 왕조 권력은 마지못해, 혹은 기만적이면서도 그것에 대하여 무언가로 대응하는 것이 흔했다는 것. 그랬기 때문에 조선은 500년 이상에 걸쳐서 존속할 수 있었다고 보았다.(191쪽)
또한 조선에서 민란이 발생했을 때 그 처벌 수위는 일본의 민란인 잇키(一揆)의 처벌에 비해 전통적으로 관대하여, 처형은 지도자 한두 명에 그쳤고 오히려 민란으로 내쫓긴 부정한 관리가 반드시 처벌되었다. 일본인들은 전근대 조선 왕조의 민중 지배가 야만스럽고 가혹했다는 이미지를 갖고 있지만, 그러한 이미지야말로 일본의 편견이다.(85쪽) 사실 에도 시대의 백성 잇키 처벌도 야만적이거나 가혹한 것이 아니었는데, 메이지 정부 들어 민중 반란 탄압 방침의 방향이 엄격했다는 사실이 최근의 민중사 연구자에 의해 밝혀지고 있는 실정이다.
결국 <한국 병합>은 조선 민중이 장기간에 걸쳐 익숙해졌던 유교적 민본주의에 바탕을 둔 정치 문화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을 의미했다. 식민지 지배의 본질이라는 것은 종주국 총체로부터 다양하게 이루어진 수탈ㆍ차별ㆍ억압과 그것을 보장하는 폭력의 체계성에 있다. 무단 정치는 바로 그러한 폭력성을 유감없이 발휘했던 지배의 모습이었다. 총독부는 폭력적인 정치 문화를 위로부터 일방적으로 억눌렀을 뿐 조선인과 공유하는 정치 문화를 구축하려 하지는 않은 것이다.
이의 제기의 정치 문화를 부정당한 조선 민중은 폐색감과 깊은 절망의 심연에서 살 수밖에 없었다. 민중은 <배회>조차 금지를 당했고, 축제도 제한되었다. 3ㆍ1 운동은 바로 이러한 폐색 상황을 일거에 깨트리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은 누구나 축제처럼 <독립 만세>를 부르짖었고 축적된 에너지를 발산한 것이다.(192쪽)

“에도 시대 조선 통신사의 일본행 사라지면서
일본 민중의 조선인 멸시관 형성돼”


에도 시대에 이른바 한류 역할을 했던 조선 통신사 덕분에 일본 민중은 조선 통신사의 화려한 복장, 처음 듣는 이국의 음악에 끌려 이국을 향한 동경을 강하게 품었다고 한다. 각종 축제에 조선 통신사를 모방한 행렬과 춤이 나타난 것에서 알 수 있듯 조선 통신사 그 자체가 마츠리라는 일본의 민중 문화에 융합되어 표상되었다고도 말할 수 있다.(277쪽) 그런데 근대 이후 일본 민중의 조선인관은 멸시로 선회한다. 한국 강제 병합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조선인에게 무차별 폭력을 휘둘렀다. 그 원인이 어디에 있을까? 일본 민중의 변화된 조선인관의 원인을 분석하고자 한 스다 츠토무는 흥미롭게도 에도 시대의 대표적인 미디어라고 할 수 있는 조루리(반주에 맞춰 이야기를 읊는 공연)와 가부키에서 그 해답을 찾고 있다.
18세기 전반에 치카마츠 몬자에몬과 키노 카이온이라는 인기 작가들이 조선 통신사의 오사카 방문을 겨냥해, 조선ㆍ조선인을 조루리 작품(시대물)에 도입했다. 침략군에 패한 조선 왕이 목숨을 구걸하고 조선은 일본에 복속하는 것으로 묘사되는가 하면 조선이 일본에 패해 <삼한 왕이 일본의 개>가 된 것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스다 츠토무는 이 두 가지 이야기가 18세기 후반 이후의 조루리ㆍ가부키 작품에 전승되어 갔다고 분석한다. 결국 18세기 후반, 조선 통신사의 일본행이 격감하는 정세하에서 일본에 의해 멸망한 조선인이 원한을 가지고 복수를 다짐하는 인물로 묘사되고, 모반에 실패하는 이야기가 재생산되면서 일본의 무력에 굴복한 조선인상이 일본 민중들에게 자연스레 흡수되기 시작했다는 것.
19세기, 조선 통신사의 일본행은 더 이상 없었다. 더불어 절멸하지 않는 조선인의 원한이라는 새로운 구성을 도입한 조루리ㆍ가부키가 흥행했다. 이때부터 중국인과 조선인이 구분이 사라지고 일본 무사의 충의가 강조되는 한편, <삼한인>의 <혈맥> 멸시, 조선인 멸시관이 생겨나고 있었다.(305쪽)
다시 말해 조선 통신사의 일본 방문 존재 양태에 따라 조루리ㆍ가부키 작품의 조선ㆍ조선인 표상이 변용되어 갔다고 볼 수 있다. 스다 츠토무는 <진구 황후의 삼한 정벌>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에 따른 조선의 굴복이라는, 당시 일본 민중에게는 검증할 필요도 없는 <역사>가 조루리ㆍ가부키 작품의 저변에 깔려 이들이 미디어로서 관객에 말을 걸어오고 있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확대 재생산된 이러한 미디어에 꾸준히 노출된 일본의 민중은 조선을 멸시와 비하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태도로 점차 선회한 것이다.

“병합 조약은 애초부터 무효였다고 인정함으로써 한국민의 인식에 동조하는 모습 보여야 할 때”

1985년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일본에서 한국 병합을 바라보는 시각을 정리한 와다 하루키는 일본이 청일 전쟁 이후 조선을 침략해 왕국을 점령하고, 국왕과 정부를 굴복시킨 뒤 통감 정치 5년을 거쳐 결국 1910년 무력으로 대한제국을 일본 제국에 병합했던 점은 오늘날 널리, 그리고 분명히 알려진 사실이라고 전제하면서(66쪽), 병합이 대한제국 황제와 조선 민족의 의사에 반해 힘에 의하여 강제된 것이었으며, 부당한 조약이었다는 인식을 1995년 도미치 무라야마 수상의 국회 답변, 노사카 고켄 관방 장관 발언으로부터 진전시켜 명확하게 하고, 국가적 합의national consensus로 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한다.

“일본은 멀지 않은 과거의 한 시기, 국책을 그르쳐 전쟁으로 향하는 길을 걸어 국민을 존망의 위기에 빠뜨렸고, 식민지 지배와 침략에 의하여 많은 나라, 특히 아시아 여러 나라의 사람들에 대하여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주고 말았습니다. 저는 … 의심할 바 없이 이러한 역사의 사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여기에서 다시 통절한 반성의 뜻을 표하며 마음으로부터 사죄하는 감정을 표명합니다.”

사실상 일본은 1995년 무라야마 수상이 <손해와 고통>을 가했다는 점, <반성과 사죄>를 표명한다는 내용을 담은 위와 같은 담화를 발표한 이후 과거 식민지 지배에 대한 책임 문제에서 한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고 보수 정권이 들어서면서 오히려 반동의 길을 걸어왔다. 무엇보다 한국 병합이 조선 민족의 의지에 반하여 불법적으로 강행되었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은 채 <병합 조약을 체결했다>는 형식으로 역사를 덧씌어 왔다.
결론적으로 와다 하루키는 1965년에 한일 양국이 역사적 식민 통치 관계를 청산하고 국교를 정상화하기 위해 체결한 한일 조약에 어떠한 결함이 있었든지 그 조약을 파기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국회 의결이든지 총리 담화로든지 일본의 새로운 역사 인식을 통해 한일 조약 제2조의 해석 대립을 해소하는 것, 즉 <1910년 8월 22일 및 그 이전에 대한제국과 대일본제국 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다>는 조항을 놓고 일본이 견지해 온 <병합 조약이 합법이나 해방을 기점으로 비로소 무효가 되었다는> 주장을 버리고 한국 측 주장인 <병합이 애초부터 무효null and void였다>고 인정하는 것이 오늘날 일본이 보여 줄 태도라고 강조한다.(67쪽) 물론 보상 문제는 이러한 해석의 변경과 관계없이 정치적 결단에 따라 해결되어야 함을 주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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