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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인민의 탄생 (민음 한국사 조선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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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음 한국사」제5권 『19세기, 인민의 탄생』은 열강의 각축장이 된 한반도에서 조선이라는 나라를 지키고 인간 해방의 거대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다양한 인간 군상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담아냈다. 인류가 근대를 새롭게 사유하기 시작한 지금, 전근대의 마지막 시대이자 쓰라린 패배의 역사로 기억되는 조선 500년에 주목한 것은 근대를 향해 질주하면서 잃어버린 것은 없는지, 근대를 우회하거나 추월할 ‘가지 않은 길’이 그 어디엔가 숨어 있지는 않은지 다시 살펴본다.

저자 : 김정인

저자 김정인은 춘천교육대학교 사회과교육과 교수. 서울대학교 역사교육과 및 동 대학원 국사학과를 졸업했다. 저서에 『천도교 근대 민족운동 연구』, 『민주주의를 향한 역사』, 『개벽에 비친 식민지 조선의 얼굴』(공저), 『지식의 현장, 담론의 풍경』(공저), 『미래를 여는 역사』(공저), 『한중일이 함께 쓴 동아시아 근현대사』(공저) 등이 있다.

19세기의 서

19세기의 세계



01. 우리도 그들처럼

1. 자본주의의 길목에서

― 19세기의 초점 중일 개항기(開港記) - 중국과 일본은 어떻게 자본주의에 편입되었나

2. 개항 전야의 조선

3. 강요된 새 출발

― 19세기의 창 인포그래픽으로 보는 근대의 상징들



02. 엘리트의 길

1. 세도와 왕도 사이

19세기의 초점 흥선대원군의 길 - 개혁의 기수에서 권력욕의 화신으로

2. 척사와 개화 사이

― 19세기의 초점 윤치호의 길 - 개화의 기수에서 친일의 화신으로

― 19세기의 창 인포그래픽으로 보는 19세기 조선의 바다



03. 민 民의 성장

1. 일어서는 민초들

19세기의 초점 민 개념의 역사

2. 민이 달라졌다

3. 제국과 인민

― 19세기의 초점 만인소와 만민공동회

― 19세기의 창 하늘에서 내려다본 동학농민전쟁



19세기를 나가며



참고 문헌

찾아보기

도움을 준 분들

‘민음 한국사’를 펴내며

■ 균형 잡힌 객관적인 역사, ‘민음 한국사’ 조선편 완간
“시대가 혼란에 빠져 앞이 보이지 않을 때, 고개 돌려 뒤를 돌아보고자 하는 것은 과거가 단지 흘러간 시간만이 아니라 사람살이의 온축된 지혜이자 훌륭한 경험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늘의 역사는 과거를 반복하고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의 문제를 담아 새로운 과거로서 쓰여야 한다.”

지난 2014년 1월, 이와 같은 포부로 객관적인 역사, 균형 잡힌 이야기를 전할 것을 다짐했던 ‘민음 한국사’ 조선편이 드디어 완간되었다. 인류가 근대를 새롭게 사유하기 시작한 지금, 전근대의 마지막 시대이자 쓰라린 패배의 역사로 기억되는 조선 500년에 주목한 것은 근대를 향해 질주하면서 잃어버린 것은 없는지, 근대를 우회하거나 추월할 ‘가지 않은 길’이 그 어디엔가 숨어 있지는 않은지 다시 살펴보기 위해서다.

세계사의 흐름과 함께 100년 단위로 새롭게 들여다 본 조선은 지금까지의 인식과는 사뭇 달랐다. 15세기에는 이성계, 정도전, 세종, 장영실 등 수많은 영웅들이 등장해 때 조선의 때 이른 절정을 이끌었다. 특히 정도전이 성리학을 근간으로 설계한 조선의 국가 시스템은 세계사적으로 유래가 없을 만큼 견고하고 완정한 것이었다. 조선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국가적 위기를 연이어 겪으면서도 무너지지 않았던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전쟁의 영향으로 피폐해진 조선은 영정법, 대동법 등 다양한 개혁 정책을 펼치며 재기의 기반을 닦았다. 이후 숙종, 영조, 정조 등 카리스마 있는 군주들이 권력을 쥐면서 조선은 다시 한 번 부흥을 맞았으나 근대로의 전환을 이루어야 할 중요한 시기에 세도정치가 시작되면서 결국 외세에 나라를 뺏기는 수모를 겪었다. 그러나 이 땅의 민(民)들은 근대가 궁극적으로 지향했던 인간 해방을 이루기 위해 끊임없이 투쟁했고 1945년 마침내 국권을 되찾았다. 그들의 뜨거운 투쟁 정신은 4·19혁명, 5·18 광주민주화운동, 6월 항쟁 등을 거쳐 지금까지도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 ‘민음 한국사’ 다섯 번째 권 『19세기, 인민의 탄생』 출간
학계와 독서계의 호평을 받으며 론칭했던 ‘민음 한국사’의 다섯 번째 권 『19세기, 인민의 탄생』이 출간되었다.

18세기 후반 영·정조 집권과 함께 다시 한 번 절정을 맞았던 조선은 정조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3대 60여 년간 지속된 세도정치의 폐해로 조선은 스스로 근대화를 이룰 가능성을 잃었고 결국 외세에 의해 망국의 길로 끌려 들어가고 말았다. 이유야 어쨌든 당시 조선이 서양이나 일본에 뒤처졌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조선이 뒤처졌던 것은 과학기술의 발전, 자본주의적 경제, 입헌 공화제 정치 등의 분야였지 이런 것들을 통해 궁극적으로 얻고자 했던 가치인 자유, 평등, 박애 등의 인간 해방에서는 아니었다. 당시 신분 해방, 사상 해방, 여성 해방 등을 부르짖던 조선 인민들의 목소리는 다른 어느 지역과 비교해도 결코 작지 않았다. 조선은 19세기 이래 인류사의 필연적, 보편적 흐름이었던 인간 해방으로 나아가는 길에서 뒤처지지 않았던 것이다.

『19세기, 인민의 탄생』은 열강의 각축장이 된 한반도에서 조선이라는 나라를 지키고 인간 해방의 거대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다양한 인간 군상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담아냈다.



■ 19세기 조선의 상인들은 왜 부르주아지 혁명을 일으키지 못했나?
근대를 밀어붙인 힘은 산업혁명으로부터 나왔다. 1807년 미국의 기술자 로버트 풀턴이 세계 최초의 실용적 증기선인 클러먼트 호를 띄웠고, 1825년에는 영국에서 세계 최초의 철도가 건설되며 ‘교통 혁명’에 시동을 걸었다. 새롭게 개발된 엔진은 시민혁명에도 중요한 동력으로 작용했다. 프랑스혁명군의 사령관이던 나폴레옹이 황제로 즉위함으로써 혁명 정신을 파괴했으나, 유럽 각지에서는 봉건적 잔재를 없애고 근대적 국민국가를 건설하려는 움직임이 거세졌다.

19세기 조선 역시 거대한 시대적 흐름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18세기 이래 지속된 상업의 발달로 거대한 상업 자본이 축적되었고, 상인들은 수공업자들을 고용해 질 좋은 상품의 생산을 독려하는 한편 체계적인 조직망을 기반으로 활발한 상업 활동을 전개했다. 또 전국 각지에 장시가 발달하면서 농민들의 생산 욕구도 한층 높아져 다양한 상품작물들이 생산되기 시작했다. 농업 생산력의 증가와 상업의 발달은 탄탄한 자본력을 바탕으로 근대화의 주역이 될 중간 계층의 성장을 촉진했다.

부를 축적한 상인들은 선택의 기로에 섰다. 하나는 권력과 결탁해 좀 더 쉽게 부를 축적하는 길이었고, 다른 하나는 기존 질서를 해체하고 자신들에게 유리한 새로운 체제를 만드는 것이었다. 상인들은 전자를 택했다. 세도정치로 권력이 독점되면서 권력에 줄을 대는 일이 훨씬 더 쉬워졌고, 그들에게서 얻는 특권 또한 커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 정부는 새로운 사회 계층으로 성장한 상인에 대해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조선은 건국 이래 설정한 신분제의 원칙에서 한 걸음도 벗어나지 않았고, 상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할 수 있는 정치 세력을 형성할 수 있는 입장에 있지 못했다. 동시대의 그 누구보다 상업의 유용성과 상업 발전의 필요성을 잘 알았던 박지원조차 돈을 재앙으로 인식하고 개인적인 이익 추구를 비판했던 데서 조선이 끝내 양반 의식을 극복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상인들 스스로도 체제를 바꾸는 데 소극적이었다. 오히려 체제에 순응하고 기회가 되면 기득권층으로 편입하려 안달했다. 막대한 재산을 국가에 헌납해 관리로 변신한 의주 상인 임상옥이 그 대표적인 예다. 전국 각지를 떠돌며 지방 장시를 연결했던 보부상들 역시 사회의 천대를 극복하는 방법으로 성리학적 질서에 순응하는 길을 택했다. 효제, 경로 등 유교적 예의범절을 기본으로 하는 규율을 만들고 이를 엄격하게 지킴으로써 자부심을 지켰던 것이다. 이처럼 상인들 스스로 개혁 세력이 되기를 거부함으로써 조선 인민의 해방은 더 요원한 일이 되었다.



■ 위로부터의 혁명, 엘리트의 길
19세기 조선의 통치자들 앞에는 두 가지 과제가 놓여 있었다. 대내적으로 중세적 왕권 체제를 대체할 새로운 정치 체제를 구축해야 했고, 대외적으로는 접근해 오는 서양 세력에 대응해야 했다. 그러나 세도 정국이 형성되면서 이러한 과제의 해결은 더욱 어려워졌다.

철종이 죽고 고종이 즉위함으로써 조선은 역사의 전기를 맞았다. 왕의 아버지로서 정권을 잡은 흥선대원군이 다양한 개혁을 단행하며 세도정치의 폐단을 수습했다. 하지만 개혁 과정에서 세도가들과 타협하고, 장성한 고종에게 권력을 이양하는 대신 국왕의 경쟁자로서 권력을 사유화했다는 점에서 흥선대원군은 또 한 명의 세도가였다는 비판에서 자유롭기 어렵다. 고종은 여러모로 아버지 흥선대원군과는 달랐다. 대외 정책에 대한 입장이 특히 대조적이었는데, 줄곧 쇄국을 유지하던 조선은 고종의 친정과 더불어 개방으로 대외 노선을 급선회했다. 이후 다양한 개혁을 단행하며 근대적 군주로서의 면모를 보이던 그는 황제권이 위협이 된다는 이유로 독립협회를 강제 해산함으로써 전근대 군주의 태생적인 한계를 드러냈다.

조선의 가장 오랜 통치 조직으로서 공론을 대변했던 유림은 전통적 화이(華夷) 질서의 재건을 통해 당면한 과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하지만 조선에서는 이미 화이 의식이 상당히 약해져 있었고, 유교 자체의 영향력도 꽤 위축된 상태였다. 오랜 붕당정치의 폐해로 자신들의 권위가 위협받는 상황에서도 유림은 힘을 합치지 못했다. 일부는 정계 진출을 포기하고 성리학 연구에 몰두하기도 했다. 이후 천주교의 확산과 서양 세력의 위협이 뚜렷해지면서 유림들은 위정척사 운동을 이끌며 목소리를 모았으나 시대의 흐름을 되돌리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심성 수양보다는 민생 안정이나 국가정책 같은 경세 문제에 관심을 가졌던 일부 유림의 제자들이 19세기 후반 개화 세력을 형성했다. 그들은 하루빨리 문호를 개방하고 서양의 발달된 기술과 문물을 받아들여야만 조선을 지킬 수 있으리라 믿었다. 개화 세력은 강화도조약 이후 고종의 개화 정책을 보조하며 대내외적인 개혁을 활발히 전개해 나갔다. 그 과정에서 개화 세력 내부의 노선 분화가 나타났다. 기존의 개화 세력이 동도서기를 기본으로 한 온건한 개혁을 추진하며 청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자 했다면, 김옥균을 위시한 급진 개화파는 청과의 관계를 끊고 입헌군주제로 대표되는 훨씬 급진적인 개혁을 이루고자 했다. 양측의 갈등은 결국 갑신정변으로 폭발했다. 갑신정변으로 고종은 자신의 개화 정책을 보좌하던 두 세력을 모두 잃었고, 급진적인 문명개화의 가능성은 완전히 차단됐다.



■ 공노비 해방부터 만민공동회까지, 민(民)이 눈을 뜨다
19세기의 벽두인 1801년(신유년), 역사의 흐름을 바꿀 거대한 사건이 연이어 일어났다. 공노비 해방과 대규모의 천주교 박해가 바로 그것이었다. 전 세계가 자유, 평등, 박애의 가치를 추구해 나가던 시기, 조선의 권력은 공노비를 해방함으로써 그 흐름에 발맞추는 듯했으나 그뿐이었다. 오히려 평등사상을 내세운 천주교 신자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함으로써 인간 해방을 향한 인민의 열망만 키웠을 뿐이다.

만민 평등의 조류가 밀려듦에 따라 변란을 통해 단숨에 권력을 쥐고자 하는 이들이 생겼다. 그들은 ‘새로운 세상을 이끌 정도령이 나타날 것이라는 메시지(정감록)’로 민중들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조선 최초의 농민 봉기로 꼽히는 홍경래의 난(1811년) 또한 그런 움직임 가운데 하나였다. 신분제 해체 과정에서 인민들은 불평등하고 부조리한 현실에 눈을 떴다. 세도정치에서 비롯된 삼정의 문란은 백성들의 삶을 피폐하게 했고, 소청 · 벽서 · 납세 거부 등 소극적 저항으로 일관하던 백성들이 결국 집단행동을 통해 살길을 모색하게 됐다. 그 흐름의 끝에 삼남 지방 전체를 휩쓴 임술 농민 봉기가 있었다.

그로부터 두 해 전 옛 신라의 도읍이었던 경주에서 동학이 탄생했다. 하느님이 내 몸 안에 있다는 논리(시천주, 侍天主)로 인간 평등을 주장하고 나선 동학은 천주교와 함께 가난한 백성들의 마음을 어루만졌다. 각성한 인민은 동학을 종교 운동에서 정치 투쟁으로 변모시켰고, 이는 마침내 동학농민전쟁으로 발전했다. 자유롭고 평등한 정의 사회 구현을 향한 민의 요구는 독립협회라는 자발적 결사체와 만민공동회를 통함 참정권 요구 운동을 탄생시켰다. 권력에 맞서 시대 변화를 이끈 인민의 탄생은 19세기 조선이 거둔 가장 큰 역사적 성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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